기획자와 정신병
Posted 2007/04/23 04:17생각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세상 일이란 게 없는 법이지만 기획(planning)이란 분야는 그 일의 특성 자체가 어떤 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가끔 이 분야의 일에 적응한 사람들, 특히 적응력이 매우 높은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어떤 정신병적 특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경우가 있다. 특히 편집증과 관련한 특성 말이다. 모든 사물은 제 역할에 맞게 제 자리에 있어야 하고 모든 일은 계획된 것처럼 진행되야 하고 예상 외의 현상조차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이 강박관념과 일종의 편집증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게 기획이라는 업무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할 때 가벼운 사안이라면 마음이 아픈 정도지만 그 규모가 크거나 심각하다면 깊은 자기 반성과 함께 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 탓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번 기획을 할 때는 결코 그런 예견치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각오를 다지고 더 세심하게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제어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된다. 또 어떤 일은 아무리 오랜 시간 준비를 하더라도 막상 그것이 현실화되는 시점이 되었을 때 환경과 변수에 의해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 준비한 부분(제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보다 훨씬 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끔 기획 단계에서 그렇게 철저히 준비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정도로 변수가 마구잡이로 발생할 때는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여전히 아마추어인 것인가? 반문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여러번 반복하다보면 즉 기획을 오래 자주 하다보면 기획이라는 것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을 계속 확대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줄이는 과정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제어할 수 있는 것과 제어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기획의 기초임을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웹 사이트 효율성과 불확정의 영역"이라는 글을 통해 웹 사이트를 기획할 때 확정된 영역(제어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책임감있는 기획이 필요하고 나머지 불확정의 영역(제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특징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기획자는 기획의 과정에서 끊임없는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상사나 클라이언트가 그런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스스로 고통을 강제한다. 어떤 개인에 따라 그런 스트레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분명히 기획자는 그런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을 갖기 위해 기획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 기획자는 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최선을 다해 기획하고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원이 고갈되어 기획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제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통해 기획자는 자신의 잘못과 어쩔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불필요한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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